Park Dukjun 《The Song of the Line》항백(Hangbak, 박덕준) 개인전〈필선의 노래〉6.12-6.18, 백악미술관 | 필선의 노래로 생동하는 공간 _ 이주희 미술평론가
- 항백스튜디오

-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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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3월 2일

항백(Hangbak, 박덕준), 개인전,
|〈필선의 노래〉전, 6.12-6.18, 백악미술관
필선의 노래로 생동하는 공간
이주희 미술평론가
지필묵(紙筆墨)은 인류의 역사에서 오래도록 근원과 추이를 찾을 수 있는 문명의 지표이다. 특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고대국가 시기로부터 전해오는 지필묵의 풍격(風格)과 법도(法道)를 계승하며 현재에도 가치 있는 문예양식으로 삼고 있다. 지필묵과 함께하는 문예 중 서예(書藝)는 새기는 것으로 관계를 맺는 계각(契刻) 문자로써 갑골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지닌다. 항백(Hangbak) 작가는 이러한 역사를 따라오며 오랜 시간 서법 연구를 진행해 옴과 함께 서예의 미학과 함께할 수 있는 예술미를 탐색해 왔다. 서예를 “문자라는 무형의 체계가 붓으로 쓰여지는 것”이라 말하는 작가는 근래에 들어 “관계의 서법”이라는 작업 원리와 지필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각예술미를 탐색하고 있다. 항백 작가의 이번 개인전 〈필선의 노래〉는 지필묵을 이용한 필선이 어떻게 공간과 조화를 이루며 조형을 이루어 가는지 또 이러한 시각적 표현이 어떠한 변별점을 가진 미학으로 컨템포러리 아트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전시 〈필선의 노래〉에는 그간 축적된 실험의 집약체인 작품 40여점이 출품됐다. 작가는 전시를 총 7개의 주제이자 곡(曲)으로 제시하는데 각각의 곡마다 지필묵에 대한 이해, 서법의 원숙한 활용, 기존의 예술미에서 나아가 인식의 확장을 시도하는 시각적 표현의 실험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첫째(1곡)로 제시하는 것은 선(線)에 내재하고 발현되는 기세와 조형의 시간성에 대한 사유이다. 출품작 〈고대인의 약속〉(2023)은 고대의 갑골문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사용되고 있는 글자 ‘기其’의 조형을 해체-재조립하여 호방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문자는 수천년간 이어진 의미 체계이자 소통력을 지닌 조형 체계로 작가는 이러한 문자가 가진 생명력에 착안해 땅을 가르듯 힘 있는 선과 뻗침으로 표현했다. 〈청동기 시대〉(2024)는 ‘기其’에 대한 보다 진취적인 조형성을 보여준다. 작품 속 형상은 문자 본연의 기능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나 현시대의 캐릭터 혹은 이모티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상형(象形)에서 출발한 문자가 현시대의 또다른 상형이 되어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현상을 만날 수 있다.
항백의 작품들은 직접적이고 직시적인 형상을 포함하면서도 형상 너머에 존재하는 또다른 의미들을 사유하게 한다. 현상을 강하게 주입 시키는 현시대의 미디어적 지각과는 다른 능동적 지각을 작동시키는 작가의 작품은 화면 위의 선(線)들이 만들어내는 기세와 운(韻)이 어떠한 감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에 관심을 둔다. 4곡(曲) 〈항백 문자도〉(2024)의 화면에 가득 찬 조형들은 인파가 밀집한 휴가철의 해수욕장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같은 조형성은 당대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두보(杜甫, 712-770)의 구절을 문자도로 변형시킨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문자와 시가 지닌 고유한 기능은 물러나고 조형 각각의 개성과 밀집된 양상이 주목을 이끈다. 〈항백 문자도〉의 조형들은 화면의 높은 밀도 속에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레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휴가철 피서객들이 붐비는 모래사장에서도 저마다의 공간감으로 자신의 구역을 확보하듯 안정적인 운(韻)을 형성한다. 작가는 오랜 시간 “선들이 화면에서 맺는 관계”에 주목해 왔으며 “관계 맺기는 곧 공간 만들기”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선과 표현들이 자신의 고유한 기세를 품고 활력을 발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작가가 “관계론 서법”으로 선보이고자 했던 창작론이자 공간예술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동양의 미학이었던 예악(禮樂)은 형식미의 추구와 함께 인간을 교화하는 정서적 공감을 이야기 했다. 물리적 현상과 비물리적 현상의 관계 맺음이자 조화의 양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이러한 미학적 구도는 항백의 “관계론 서법”에서도 발견된다. 항백은 “관계가 주로 요소들 사이의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물리적 거리이자 공간을 사이에 두고 ‘기세’와 ‘운’ 같은 비물질적 작용들이 미감을 형성해 설득력을 얻는 것을 예술의 한 성취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항백이 오랜 시간 연구한 추사 또한 “기세란 필획의 강하고 예리한 곳에서 나오고, 운은 빈 곳에서 어울림으로 얻는 것(勢出於勁利 韻取於虛和)”이라는 깨달음을 『완당집(阮堂集)』에 남긴 바 있다. 항백의 6곡(曲)에 출품된 〈역사와 신화〉 시리즈는 이러한 기세와 운을 보다 극적으로 운영해 형상과 문자 그리고 선의 대비를 심화시키면서도 여백을 풀어놓아 화면 속 요소들의 존재감이 충돌하지 않고 살아난다. 다량의 세필로 분해된 문자도는 운필의 속도감과 함께 운동성을 드러내고 큰 붓으로 무심하지만 무겁게 그어 내린 필선은 세필을 뒤덮거나 대치하며 정동(停動)이 공존하는 관계성이자 공간을 드러낸다. 전통의 문자와 획의 운영으로 적요함과 수다스러움이 공존하는 다원적 공간이 창출된 것이다.
항백 작가의 지필묵에 대한 천착은 문자와 조형적 표현 모두에 있어 “물리적 형태가 없는 개념적 형태를 구성해 시적 느낌을 이루어 내는 것”이라는 이해로 나아갔다. 이같은 창작 원리는 현상과 의상(意像)을 해체해 시각적 표현으로 전환한다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원리와도 닮아있다. 또한 서화(書畫)의 동질적 추구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서화의 필선에 담길 기운을 이해하고 기질을 구분하여 사용할 수 있으며 표현 요소들이 존재함에 있어 조화를 이루며 생동할 수 있는 공간감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회재回齋〉(2025)는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른 달처럼 보이기도 하고 앙상한 나무 옆에 자리한 처소로써 추사의 세한도가 연상되기도 한다. 문자와 필선에 근원을 둔 표현이 상상력에 작용하고 여미(餘味)를 담는 화면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고전은 반복되는 과거가 아니라 다시 불러내어 쓰기를 기다리는 원리 그 자체”라는 작가의 말처럼 시공간을 넘나드는 원리들이 필선의 울림이자 ‘필선의 노래’로써 생동하는 공간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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