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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추사

Monthly Chusa

2025.09 제 1호

 

​월간추사 2025.09 제 1호 : 항백스튜디오

 

서가(書家)에 필법(筆法)이 있고 또 묵법(墨法)이 있다.
- 추사어록 중에서

 
CONTENTS

  • 초서에 원리가 있다. 

- 至(지)에 담긴 초서 코드 (첫번째)
초서 공부의 출발은 형태 모사였지만 필자는 초서의 기원과 구조적 원리를 고찰한다. 진예(秦隸)의 실용성, 기호화는 초서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진-한 말기의 문자변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허신의 『설문해자』 서문은 고문의 단절을 진예에서 찾고 있으며 초서 형성의 전환점이 그 안에 있다. 至(지) 문자를 중심으로 이 과정을 살펴본다.

  • 서보(書譜)읽기

 
- 서보 읽기를 연재하며 
- 세필로 다시 쓴 서보 1, 2번 문장

 

至(지)에 담긴 초서 코드

처음 초서 공부를 시작할 때 일이다. 형태를 따라 익히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초서가 왜 그런 형태로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과거로부터 초서를 익히는 거의 모든 이들의 공부방법이 그렇고 내가 공부할 시기에도 그랬다. 처음에는 선생님을 모시고 특별히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공부하였다.

전통방식에 따른 철저한 형태 습득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과거방식이 흡족하지 않았지만 다른 연구를 해볼 겨를이 없이 따라 익히는 데 급급하였다. 생각해 보면 이후 혼자 초서에 집중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 후 스스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를 추정을 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큰 성과가 없어도 멈추지 않았다. 뭔가 논리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잠시도 버린 적이 없다. 그때로부터 만 20년이 지나고 있다. 

<초서에 원리가 있다>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글자가 그때 만났던 至이다. 처음 至의 초서를 대하고 숨이 턱 막혀 버렸다. 첫 부분부터 이 형태는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사진에 초서 至는 위진(魏晉)시기 왕희지 초서로 알려져 있다. 이 글자의 정체를 알기 위하여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漢)나라 때 사용된 문자를 만나고, 그 이전 진(秦)시기까지 올라간다. 진으로 부터 한나라 말 까지는 문자 대변혁 시기에 해당한다. 至 초서는 결국 이 시기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관통하고 있다. 至에는 그 시기를 지나오면서 형성된 초서코드가 마디마디 박혀있다. 초서 진행의 원리를 至 변화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갑골문으로부터 시작된 한자 문자는 전국시대 금문(金文: 제사용 기물등에 주조한 문자)과 초간(楚簡: 초나라 지역 출토문자)을 거쳐 진나라 시기 소전(小篆: 전서에는 대전과 소전이 있고, 이중 진나라 전서를 소전이라하며 전서와 소전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함) 으로 이어진다. 고대문자는 여기까지 일단락되고 다시 새로운 문자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 시대는 한나라 전 기간을 지나 한말에 이르러 마무리 된다. 지금의 문자를 한자(漢字, 한나라를 지나며 새롭게 태어난 문자)라 불리게 된 이유라 한다. 변화가 진행된 후 한자는 한나라 말에 1차로 정리되는데 그 문자가 예서(隸書)와 초서(草書)다. 그 뒤를 이어 행서(行書)와 해서(楷書)가 이를 따라 정립되었다. 현행 5서체는 변화 이전 고대문자 계열에 속하는 소전 1서체와 변화 이후 현대 문자화된 초서, 예서, 행서, 해서 4서체를 합하여 5체가 되었다. 5서체는 변화 전후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문자 변혁시기와 5서체 형성>

 

현행 5서체란, 고대문자 계열인 소전(小篆)과 문자 대변혁을 통해 형성된 예서·초서·행서·해서를 합하여 5체라 한다. 이 글에서 말하는 문자 대변혁시기란, 통일 진 시기 소전으로부터 시작하여 한나라 말기의 예서·초서 정립까지를 포함하는 시기이다. 이후 행서·해서로 이어지는 서체는 이 변혁의 완성 위에 놓인 단계라 할 수 있다. <진간> 등 문자의 출토는 문자 변혁 시기 당시의 실제 사용 문자를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가 된다.

 

- 초서는 통일 진(秦)에서 시작되었다.

초서의 시작은 구체적인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일정한 변화 과정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필자의 관심은 그 기간동안 진행 과정을 정리하는 일이다. 핵심은 ‘진행 과정’이다. 진행 과정을 정리하면 초서변화의 논리가 밝혀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과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시작이 어디인가를 특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초서의 시작을 특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초서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당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설정하였다.
<시작은 ‘통일 진나라 소전 시기’로 하고 끝은 ‘한나라 말에 초서와 예서의 완성’으로 한다.> 초서의 시작과 끝을 문자 대변혁의 시기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초서의 시작과 끝을 특정할 수 있었던 것은 최근 출토된 당시 문자 자료 덕분이다. 그동안 연구에 활용되지 못했던 당시 문자 자료 출토는 초서연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문자 자료가 출토되기 이전에는 문헌자료에 당시의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물 자료로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검토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초서에 대한 전후 관계 설정에 많은 오해를 낳기도 하였다. 그중 가장 오래동안 인정되어 온 설에 '초서는 예서(한예) 다음 과정'으로 나타난 문자라는 주장이었다. 추사(秋史 金正喜, 1786~1856) 선생도 예서를 종주로 하여 초서가 분파되었다는 당시 청나라의 학설(남북서파론)에 동의하고 있었다.

"書法이 변천하여 ... 隸書로 부터 변해서 正書와 行 草書가 되었고 그렇게 변한 시기는 모두 漢末 에서 魏晉의 시기이다." 『書法變遷 ... 由隸字 變爲 正書 行草 其轉移皆在 漢末魏晉之間.』- 완당집<雜誌>

한 편 초서의 시작이 진한(秦漢) 시기라는 기록이 여러편 있다. 다음은 그중 후한 채옹(蔡邕,132년-192년)의 말이 있다. 이는 진(晉) 색정(索靖)이 그의 <초서장(草書狀)> 에 인용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통일이전 전국시대 진(秦)나라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 秦나라 시대에 제후들이 각축하며 서찰과 격문을 서로 전할 때 봉화를 바라보고 역참을 달려가는데 전서예서는(문자가)어려워(그렇게) 빠르게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급한 상황에 부응하도록 글씨를 쓰게 되었는데 대게 지금 (한말)의 초서가 이것이다."  『昔秦之時 諸侯爭長 簡檄相傳 望烽走驛 以 篆隸 之難 不能救速 遂作 赴急之書 蓋今草書是也.』 

 

초서의 시작시기에 대하여 두 기록은 상호 모순된다. 전자는 한 말 예서 이후로 보고 후자는 진나라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실물 문자자료가 출토된 이후 전자는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게 되었다. 진 한 기간 동안 실제 사용된 문자 자료가 목간, 죽간 또는 비단에 육필로 쓰인 채 대량 출토되었고 이 자료가 자전(字典)의 형태로 정리, 출판되어 지금은 누구라도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기별 대표적인 자료로 진나라 실물 문자에 리야진간(里耶秦簡), 수호지지간(睡虎地秦簡) 등이 있고, 전한 시기는 마왕퇴죽백서(馬王堆竹帛書)등이 있다. 그 다음으로 전.후한 약 150년간(전한 소제 (昭帝 BC87) - 후한 장제(章帝 BC88)에 집중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거연한간(居延漢簡), 무위한간(武威漢簡)등이 출토되었다. 
그 이후는 한나라 말기이며 문자 대변화가 종결되는 시기로 이어진다. 이로써 소전 이후부터 한나라 말까지 공백 상태이던 문자 변화 과정의 그 퍼즐이 다 맞춰진 셈이다. 


초서 시작은 단순히 하나의 서체로만 분리하여 논할 수 없다. 문자 대변혁의 과정을 거치면서 초서와 예서가 함께 형성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초서의 시작도 예서의 시작도 한나라 말이 아니라 진나라 소전의 시기로 보고 출발 하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 통일 진(秦)의 중심문자, 진간(秦簡)의 등장

통일 진나라는 문자 수요가 증폭하는 시대를 맞이한다. 과거 주(周)나라 후기 각 지역으로 분열 되었던 전국시대의 단점이 봉건제도에 원인이 있었다고 판단한 진시황은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임명하는 중앙집권적 정치형태인 군현제를 채택한다. 이 시기 문자 수요가 급증한 주요 원인은 시대 상황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아래 진나라는 기존의 문자를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낸다.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이 정막(程邈 BC240-207 ?)이라는 문자 전문가에게 명하여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하였고, 10년 연구 끝에 두 종류의 문자를 완성하였다. 하나는 소전(小篆)이고 또 하나는 진예(秦隷)다. 『한서』 「예문지」에 ‘한서6체(漢書六體)’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 소전과 예서(진예)의 주석에는 이를 해설하는 내용이 있다. (여기의 예서는 '진예_진나라 예서' 라 한다 라고 허신이 밝힌 바 있다.) 

"전서는 소전(小篆)이다. 진시황이 정막(程邈)에게 시켜 만들게 한 글자다." 『篆書 謂小篆 秦始皇 使程邈 所作也.』 

"예서 역시 정막이 지어 올렸다. 하급관리들이 간편하고 쉽게 쓰도록 하기 위함 이다." 『隸書 亦程邈所獻主 於徒隸從簡易也.』


이상의 문헌 기록에 의하여 다음 몇 가지 정보를 살필수 있다. 첫째 진시황이 추구한 것은 문자 통일이라기 보다는 시대에 부합한 실용 문자였다. 예서(진예)를 만들었다고 진시황은 좋아했다. 문자의 통일을 지시했다면 소전과 다른 문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철저한 실용적 입장에서 실무자를 위한 문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 예인좌서(隸人佐書)라 하였는데, 실무자의 문서 작성을 돕기 위한 글자라는 뜻이다. 이를 줄여 예서(隸書) 또는 좌서(佐書)라고도 한다. 진간 문자의 목적이 문자 통일이 아니라 실용임을 알 수 있다. 당(唐)대 <서단(書斷)>이라는 글에 그 기록이 있다. 

"예서 삼천자를 만들어 바치니 진시황이 좋다하고 어사(御史)로 등용하였다." 『爲隸書三千字奏之 始皇善之 用爲御史』

"진나라에는 보고할 일이 많고 전서로는 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예자(隸字)를 사용 하였다. 이렇게 예인(隸人)을 도와주는 문자(隸人佐書) 라고 해서 이름을 예서(隸書)라고 했다." 『以奏事繁多 篆字難成 乃用隸字 以爲 隸人左書 故名 隸書』


둘째 소전(小篆)과 진예(秦隷)는 동시대 문자라는 점이다. 
진예는 소전이 점차 변해서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난 문자가 아니라 소전과 다른 개념의 문자를 소전과 동시에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문헌의 기록에 정막이라는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종류의 문자를 만들었다 하였고, 실물 출토 자료에서도 동시대 사용된 문자라는 사실은 입증되고 있다. 실제 진예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전달하는 공문서에 대량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실물 출토 자료에 의해서 밝혀졌다. 그 대표적인 자료가 ‘리야(里耶)진간’이다. 

2002년 6월 호남성 용산현 리야 고성지에서 대규모 목간(木簡)이 발굴되었다. 그 중 1호 우물(井)에 출토된 간독이 약 3600매로 대규모 자료다. 이 자료가 지닌 중요한 의미는 이 문자가 진예(秦隷: 진나라 예서)라는 점, 그동안 문헌으로만 알려진 진예가 어떤 문자인지 알게 해 준다는 점이다. 또한 이는 진(秦)의 중앙정부가 리야(里耶) 라는 지방으로 보낸 공문서로 기년(紀年)이 확실하다는 점인데 이는 문자사(文字史) 연구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연대는 진시황 25년 - 37년(BC 222-210)과 2세 원년, 2년(BC 209-208)의 15년 간에 해당한다. 진은 통일 후 존속기간이 불과 15년간(BC 221-206)에 불과한데 이 공문서는 통일 직전 연도부터 멸망까지 통일국가가 존속되었던 전 기간 사용된 문서임을 알 수 있다.  

 

- 상형해체 와 기호화 진행

이제 진나라에서 진간(秦簡)의 사용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구체적인 문자의 편방 구조를 통해 살펴보자. 진간과 소전의 문자를 비교해보면 외형에 특이한 차이가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이렇다. 至는 출토된 갑골문 등을 근거로 해석하기를 ‘화살이 날아와 땅에 꽂히는 형상’으로 '이르다'의 뜻이 있다하고 ‘화살’과 ‘땅’이 결합된 문자로 본다. 이렇게 보는 방식은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 인식으로 소전도 당연히 이런 방식을 따른다. 따라서 소전에서는 화살의 몸통과 깃부분이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하지만(사진 좌측), 진간에서 분리되었다.(사진 우측) 깃에 해당하는 두 점과 그 아래 몸통으로 분리된 것이다. 진간에서는 더 이상 ‘화살’이라는 상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아래 <소전과 진간의 인식 차이>에서 소전과 진간의 문자 인식을 살펴보자. 

소전에서는 화살과 땅이라는 두 개의 의미부분으로 구분하므로써 至의 상형을 보존하고 있으나 진간에서 至는 3개로 분리함으로써 상형이 무시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소전과 진간의 인식 차이>

 

상형 무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정도 심각한 상형 무시는 갑골문이나 금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상형문자라고 하는 한자의 정체성마저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이는 결국 기호화로 진행된다. 진간(秦簡) 至에서 3개 기호로 분리된 현상은 한말 이후 완성된 예서 초서에서도 3개 기호로 구성되어 진간의 기호 인식이 그대로 이어진다. 진간은 이와같이 상형 해체와 기호화 인식의 출발점이다. 


- 다시보는 허신(許愼)의 기록

문자 변화에서 이 시기의 중요성에 대해 기록한 자료가 있다. 후한 허신(許愼 AD58-AD148)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 서문이다. AD 1세기경 허신이 활동하던 한나라 중반, 당시 집중적으로 사용한 문자는 고문과 다른 생략된 문자였다. 그 문자로 쓴 유학 경서를 금문(今文) 경서라 하며 유학을 국시로 정한 당시의 모든 경서에 이 문자를 사용하였고 관의 공문서에도 이 문자를 쓴다. 심지어 관리가 되고자 하는 학동들이 공부하고 시험보는 과목도 그 문자다.  

 

허신은 고문의 가치를 중시하여 고문복원을 주장한 학자다. 그의 눈으로 본 당시 생략문자(진예)는 전통 문자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할 만큼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폐단을 지적한다. 그 폐단이란 문자에서 상형의 의미가 무시되고 근거도 없이 기호로 사용되는 현실이다. 그는 이렇게 된 원인을 찾아본 결과 그로부터 약 300년 전, 진나라에서 있었던 진예(秦隷)가 그 시작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의 저서 설문해자 서문에 이를 기록하였다.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이 한 문장을 다시 살펴본 내용이다.

 

"이 시기(진말)에... 처음으로 예서(진예)가 있었다. 정막이 지어 올렸는데 하급 관리들이 간편하고 쉽게 쓰도록 하기 위함 이다. (이는) 생략해서 쉽게만 하려는 취지로 사용되었으니 고문이 이 때문에 단절 되었다. 이로부터 진서는 8체가 되었다." 『是時... 初有隸書 以趣約易 而古文由此而絶矣. 自爾秦書有八體 一曰 大篆... 八曰 隸書.』

 

그 문장은 ‘고문(=소전)이 진예로 인해 단절 되었다.(古文由此而絶矣)’이다. 다시 말해, 고문은 소전까지이며 진예로부터 생략의 문자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반증이다. 지나치기 쉬운 이 한 문장에 초서 형성의 기원이 숨어 있다.            

                                           

 (다음호에 계속..)

 

구름 雲 과 목어 魚 Cloud and Wooden Fish _ 항백 (48×36.5 한지 송연먹, 2025)

 

‘雲’은 변화하는 자연, ‘魚’는 물속 움직임의 상징. 두 형상을 문자적 감각으로 병치한 이 작품은 신화적 상징과 서예적 붓질을 교차시킨 조형적 우화이다.

 

서보(書譜) 읽기


연재를 하며..

서보(書譜)는 당나라 손과정이 남긴 서법 이론서입니다. 
3,700여 자로 쓰였으며 전편이 초서로 기록되어 왕희지 시기의 초서를 잘 보여줍니다. 또한 시적인 문장 덕분에 오래도록 사랑받아 온 책이기도 합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이 책이 담고 있는 서법의 개념입니다. 
한말·위진 이후 당대까지의 짧은 시기 기록이지만, 초기 서법 이론이기 때문에 이후 조맹부의 서법이나 조선의 주류 서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오히려 추사 서법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됩니다.

서법 이론의 깊은 의미와 깨달음은 독자에게 맡기고 이번 연재에서는 자구(字句)를 하나씩 짚어 읽어 가며 20여 년 전의 독서를 다시 정리 합니다. 필자의 세필로 다시 쓰여진 서보 작품으로 월간추사를 통해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서예가  항백 박덕준

 

1.  夫自古之善書者 漢魏有鍾張之絶  / 晉末稱二王之妙      

 

무릇 예로부터 書를 잘 하는 이는 한(漢)의 장지(張芝)와 위(魏)의 종요(鍾遙)가   뛰어났고 진(晉) 말(末)의 이왕(二王, 왕희지,왕헌지)이 신묘(神妙)하다고 일컫는다.

 

2. 王羲之云 頃尋諸名書 鍾張信爲絶倫  /  其餘不足觀 可謂鍾張云沒而羲獻繼之   

 

왕희지가 말하기를 “근자에 여러 유명한 서가(書家)의 필적(筆跡)을 살펴보니 종요와 장지가 참으로 뛰어났고 그 나머지는 볼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종요와 장지가 죽은 뒤 왕희지와 헌지가 그들을 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월간추사  2025. 09 제 1호

원고집필 : 항백 박 덕 준  hangbak park

Email Address : parkhangbak@gmail.com

Web site : www.hangbak.com

디자인 : 월간추사 편집부 / Art Director 김 나 희

이 원고 및  출간물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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